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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독서

20200222 아가씨 각본집

싱싱하 2021. 7. 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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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영화나 드라마를 열렬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구미에 잘 맞는 작품은 대본집을 보기도 하고 감독이 영감을 얻은 원작을 잘 읽어보는 등 콘텐츠의 줄기를 따라가 보는 편인데요. 이번 주에는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 기념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각본집'을 읽었습니다.

실제로 영화화된 작품들과 이런 대본집을 번갈아 읽으면 새삼 각색의 창의성, 무대 미술의 상징성, 카메라 워킹, 음악 효과 등등 한편의 영화를 연출하는 데 있어서 스토리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각적인 요소가 필요한지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어서 매번 흥미롭게 읽게 되네요

각본집, 대본집의 경우 내가 이 내용을 연출한다면 누구를 캐스팅하고 어떻게 이 장면을 그러낼 것이며, 이런 톤으로 연기를 지도하고 공간적 감각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상상해보면서 읽는 재미가 있어서 좋아합니다. 그런 게 매력이죠!

물론 아가씨 같은 영화는 워낙 영화볼 때 영상적 이미지가 강해 서서 새롭게 상상하는 재미보다 연출진이 의도한 바를 짚어내는 또 다른 재미가 있지만 혹시 대본, 각본집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한번 새로운 문학의 장르라고 생각하시고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시나 소설, 수필과는 다른 희곡만의 특징이 있거든요

내용 줄거리는 조금만 검색해도 나오는 것이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덧붙여서 저는 이 내용 관련해서 대본집이랑 영화에 원작은 <핑거스미스>라는 소설을 각각 봤는데 사실 <핑거 스미스>는 줄거리와 캐릭터를 빌려온 느낌이고 서사상은 꽤 다른 느낌이라 개별 작품처럼 보셔도 좋을 같아요

 

2. 대본집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포인트

2.1. 생각보다 대본집만 읽었을 때는 덜 외설적이다.

물론 텍스트에도 성적인 대사나 장면이 서술되어 있지만, 단순히 텍스트를 통해 제가 상상하는 것과 달리, 잘 연출된 카메라 워킹은 훨씬 더 극적인 긴장감을 이끌어 냅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교감 장면은 정사씬보다는 숙희가 히데코를 아기처럼 씻겨주는 장면이었는데요. 그 손가락에 골무를 씌워서 아가씨의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이, 보시면 특히 화면의 시선처리가 긴장감을 더 이끌어내 주어서 인상에 깊게 남습니다.

이 장면이 전반부에 숙희 시점에서 한번, 히데코 시점에서 한번 나오는데요. 아래는 각본집 내용이에요

 

#22. 히데코의 욕실(낮)

히데코
입 안이 자꾸 베여... 이 하나가 뾰족한가봐.

숙희, 양손으로 히데코의 얼굴을 감싸 쥐고 들여다본다. 간 유리를 통해 희미한 햇빛이 들어올 뿐이지만 히데코의 벌어진 입안에 분홍빛 혀와 흰 이들은 잘 보인다. 손가락을 넣어 하나씩 만져보더니 재빨리 욕실 밖으로 뛰어나간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히데코. 또 뛰어서 돌아오는 숙희, 은제 골무를 보여주며 자기 입을 벌려 보인다. 따라 하는 히데코, 골무 낀 손가락을 집어넣어 이를 갈기 시작하는 숙희. 사각사각. 처음에는 눈을 감고 있더니 어느새 숙희를 보는 히데코, 뺨이 붉게 물든다. 덩달아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숙희. 정신을 딴 데 팔려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향을 음미한다. 오히려 취할 듯이 감미롭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숙희

숙희
이 냄새였구나....

입을 크게 벌리고 있어 말을 못 하는 히데코. 그저 동의하듯 신음 소리를 낸다. 숙희, 히데코의 시선을 피해 목을 본다. 히데코가 침을 삼키자 울대뼈가 올라갔다 내려온다. 시선이 내려간다. 수면 아래로 뵈는 히데코의 젖꼭지가 숨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한다. 히데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숙희를 본다. 이윽고 골무를 빼는 숙희. 맨 손가락으로 이를 가만히 문질러 매끄러워졌는지 확인한다.

 

 #103. 히데코의 욕실(낮)

사각사각-이빨 갈아주는 동안 초조한 듯 엄지로 숙희의 한쪽 팔꿈치를 연신 쓰다듬는 히데코의 손 클로즈업. 슬며시 눈 떠 보는 히데코. 눈이 마주치자 숙희 뺨이 붉게 물든다. 숙희가 시선을 피하자 마음껏 그녀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볼 수 있게 된 히데코, 솜털며 땀구멍까지 들여다본다.

히데코
겨울이면 훔친 가죽 지갑들을 엮어 외투를 만들었다는 유명한 여도둑의 딸, 저 자신도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2.2. 이 영화의 미술상 수상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다.

저는 영화에서 인상 깊은 부분이 히데코가 커다란 나무에 밧줄을 목을 매는데 숙희가 와서 받들면서 구해주는 장면이랑 탈출하면서 낮은 담을 함께 넘어가는 장면인데요.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놓칠 수 있었던 부분을 텍스트로 봐서 좋기도 하고, 배경 묘사는 단순한데 이를 시각화하는 미술팀, 소품팀의 능력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57 담(밤)
무릎 높이로 낮게 둘러친 담장이 길게 이어졌다. 숙희, 한 걸음에 가뿐히 뛰어넘는다. 히데코는 담 앞에 서서 그 너머 저택 바깥을 응시할 뿐 꼼짝도 하지 못한다. 숨마저 가빠진다. 도로 넘어온 숙희, 트렁크를 담 앞에 눕혀 계단을 만들어준다. 얼어붙은 히데코의 발을 들어 트렁크에 올려 놓아준다. 등을 떠민다. 겨우겨우 넘어가는 히데코

# 58 벌판(새벽)
날 듯이 달리는 히데코, 헐떡거리면서 겨우 따라가는 숙희. 둘 다 웃는다

 

영화에서 이 벌판을 달려갈 때의 공간감과 해방감, 이거는 단순히 텍스트로 보는 것보다 영상에서 시야가 확장되면서 그에 수반되는 음향 효과가 더 텍스트로 보는 것보다 훨씬 실감이 나죠. 이게 글자로 쓰여 있는 문학과는 다른 영상 예술의 매력인 것 같아요

 

이 외에도 미술 서적, 낭독회장, 아가씨의 방 내부와 같은 건물, 공간적 인테리어부터 커다란 벚꽃나무,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적 장소까지 읽다 보면 각본집을 읽고 나니 인물 외에 것들이 영화 보면 눈에 들어오는데, 아가씨는 유난히 독특한 패턴, 음울한 분위기, 폐쇄되고 억압적인 환경과 인물의 심리묘사를 효과적으로 돋보이게 해주는 무대 미술이 유난히 눈에 띄는 영화라는 것이 미적 감각이 그다지 없는 저도 알 수 있겠더라고요ㅋㅋㅋㅋㅋ

 

2.3 사실 저는 작가의 말이 제일 좋았습니다.

책 맨 앞에 보면 각본을 쓴 정서경 작가와 박찬욱 감독의 말이 들어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정서경 작가의 말이 이 아가씨라는 영화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가씨>를 쓸 무렵은 우리 집 작은아이가 돌이 되어서 걸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다. 

작은 아이가 외모나 성격에 있어서 큰 아이와 정반대 되는 기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일어나고자 하는 의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노력, 계속되는 실패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태도와 같은 것이 큰 아이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에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람은 아무리 다른 재료로 만들어져 있더라도 거쳐가야 하는 삶의 단계에서는 같은 목표를 부여받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쓰려고 하는 두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나는 길바닥에서 자란 작은 도둑, 하나는 닫혀있는 성에서 자란 조그만 여왕. 두 여자아이가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여있는데도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면 어떨까? 두 아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려 한다. 집을 떠나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고 한다. 미래를 만들어가려 한다. 그때 히데코와 숙희에게 서로가 딱 맞는 답이 된다.

그래서 이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면서 성장담이다.

중략

 

3.

가끔 정말 유명한 작품 말고도 재밌게 본 영화들의 대본집을 구하고 싶은데, 아직 인기 있거나 마니아층이 많은 몇몇 감독과 작품 외에는 구하기 어려워 아쉬울 때가 많아요. 혹시 다른 좋은 작품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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