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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10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싱싱하 2016. 10. 3. 00:43

160910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지음


0.

사실 이 책은 1년전에 샀다가 책꽃이에 꽃혀만 있었고, 이번주에 다시 꺼내든 책입니다. 대부분의 책은 빌려 읽지만 시집은 사서 보는 편이고 (대체로 가격도 착한편) 사서 본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시집을 자주 읽는 편은 아닙니다.
대학교다닐 때도 전공중에서 시와 관련된 수업은 <현대시론> 1개 과목밖에 안들었고 그 수업을 따라가기 굉장히 벅차했다는 기억만 있죠. 맨날 자고......

1. 
이번에 읽은 책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토지>로 익숙한 故 박경리작가의 유고시집입니다. 2008년 봄에 타계하셨는데, 벌써 시간이 8년이나 지났습니다. 시집에 대한 서평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전반적인 소감을 쓰고 시 몇개를 따로 쓰기로 했습니다.
소설가가 쓴 시라, 짧은 운율에도 꽤 구체적인 상상력이 뒷받침 되는 시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작가의 자전적인 얘기, 주변인에 대한 묘사 등등이 읽다 보면 한권의 자서전을 읽은 것처럼 작가의 생애 한켠을 엿볼 수 있어서 굉장히 인상깊었습니다. 작가가 겪었던 고단한 삶, 하지만 그 고단함 속에서도 번뜩이는 사상은 날카롭게 감각을 유지하고 있죠, 발톱을 숨긴 맹수처럼. 원래 진정한 고수는 '내가 고수다' 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목차가 
1. 옛날의 그 집, 
2. 어머니
3. 가을
4. 까치설

이렇게 섹션이 나눠져 있는데, 책을 읽다보면 앞부분은 토속적인 감수성이 깃들어있는 자전적인 얘기부터 뒷부분은 사회의 웃어른으로서 사회문제나 가치관 등 관념적인 생각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아직 날은 덥지만 가을은 시를 읽기 좋은 계졀이죠. 술술 읽히지만 독자 나름대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는 시집이어서, 나는 시가 너무 어럽고 무슨말인지 모르겠다, 싶으신 분들은 이 시집을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 
제목: 천성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했다 
결벽증,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나 친구 집에는 
발걸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싫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다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일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며 
지레 지쳐서 명줄이 줄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덤하며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외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하다 

그러나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닌 것을 나는 안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주었다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 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은 아니지 않은가




-> 천성이 저는 사실 작가가 될 운명이었나 봅니다...!....!!!!!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젊은 날 작가가 가졌던 성격이 어쩜 지금의 저랑 이리도 비슷하다고 느끼는지 모르겠네요
작가의 표현대로 현재 못된 오만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천성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아직 이 시를 쓴 작가처럼 모든것을 초월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여전히 살 날이 많은지라 감정의 탄력은 아직도 팽배하고, 미운 정 고운 정이 너무 크게 와 닿으며 무언가를 더 갖고 싶고 외로움도 느끼는 그런 사람이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이렇게 말년에 내려놓으면서 소탈하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든 시였습니다. 한때는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역시 작가가 되었어야 했나 봅니다.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닌 것을 나는 안다" 이 부분도 묘하게 위로가 되는 부분이구요.
박경리라는 작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심정적'으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시였습니다.


3.
 
제목: 친 할머니 


낡은 수박색 모보단 저고리 입고
긴긴밤 긴 담뱃대 물고
앉아 있던 친할머니
밥을 예쁘게 자시던 노인네는

장날이 되면 소금으로 양치질하고
얼굴은 수건으로 빡빡 닦고
얹은 머리을 한 뒤
열다섯 새 고운 베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지게를 진 머슴새끼를 앞세우며
출타하는 뒷모습이 훤칠했다

탐탐찮은 사람이 와서
할머니 안녕하십니까 하면
들은 척 만 척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저 그만그만한 사람이 인사를 하면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반가운 사람이 그새 편안했습니까
그러면 비로소
보일락 말락 미소를 머금으며
"편코"
그 말 한마디로 끝이었다
말수가 적고 표정이 없는 노인이었다

추운 겨울
동네에 곡마단이 들어왔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구경을 갔었다
숯불 피운 화로도 하나 사고
방석도 사서 깔고
구경이 끝났을 때
할머니는 방석을 접어서 겨드랑이에 끼고
유유히 천막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 그 방석은? 하니까
돈 주고 샀다
어린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화로는 어쩌구

그러니까 그때가......여름이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새터 차부에 갔다
통영서 생선을 싣고 진주에 가면
진주서는 과일 싣고 통영으로 오는 화물자동차
통영서는 유일한 화물자동차 차부였다
살림집이 딸려 있었다
월사금 낼 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머닌 월사금 받아오라고
곧잘 그 곳으로 나를 내몰았다
일종의 핑계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부쟁중이었고
아버지와 혼인한 젊은여자 기봉이네가
아이를 안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올곧잖은 눈으로 뭣하러 왔는냐고 물었다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 온게 아니라는 응수에
기봉이네는 함께 차부앞을 지나면서
나를 작은엄마라 했느냐 하며 따졌고
나는 악다구니를 했다
노발대발한 기봉이네는
내게 부채를 던졌고
그것이 내 얼굴을 치고 땅에 떨어졌다
그길로 나는 소리 내어 울면서
큰집으로 갔다
그년이 감히 누굴 때려!
할머니 일갈에 집안은 온통 난리가 났다
부산에 출장 갔다 온 아버지는
차부로 달려가서 기봉이네를 매질하고
양복장 서랍을 모조리 끄내어
마당에서 불질렀다고 했다
그 후
기봉이네는 깍듯이 내게 예절을 지켰다
할머니가 내 편을 들어준 것도
그때가 처음이며 마지막이었다

일본 땅을 방황했던 큰아버지와
왕방울 같은 눈과 변호사하는 별명의 큰어머니
그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하여 나는 집안의 장손녀였다
살림을 며느리에게 내어 주고
중풍으로 고생했던 할머니는
해방 직후 돌아가셨는데
팔십을 훨씬 넘긴 장수였다

당시 나는 서울에 있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며칠 후
큰집에 불이 났다고 했다
달려간 아버지가
엉겹결에 농짝 하나를 들어내었을 뿐
모든 것은
잿더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창원집 할메가
자시 살림 다 가져갔다
그렇게 말들 한다는 것이다
육이오사변으로 고향에 피난 간 나는
불길에서 건져 낸 농짝 하나
나비 장석의 귀목장을 아버지로부터 받았다
지금도 그 나비장 한 짝은 내 곁에 있다



-> 시에는 외할머니, 친할머니, 어머니 다 나오는데, 그 중 친할머니라는 시가 인상깊어서 가져와봅니다.

어머니도 까막눈이었지만 이야기꾼이었고, 외할머니는 글쎄,시를 읽어보면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는 소원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이 시를 읽다보면 어떤 할머니일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리듬감있는 산문인가 서사가 뚜렷한 시인가 사실 구분할 자신은 없지만, 저는 서사가 뚜렷한 시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친할머니에 대한 여백의 공간은 독자가 각자의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4. 

제목: 소문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는 내게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소문이 있었다

소문이란 본시 믿을 것이 못 되고

호의적인 것도 아니어서 덕될 것이 없다

살기에 지친 살마들에게는

그러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지만

놀고 먹는 사람들에겐 생광스런 소일거리


사실 그것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얘기

옛날에는 바람 따라 왔던 소문이

이제는 전파에 실리어 오고

양적으로나 속도로 보아 실로 엄청나다

뿐이겠는가

불 땐 굴뚝에 연기가 아니 나고

불 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마술 같은 일들이 진행중이다


소위 자본주의 방식이며

정치가들 뒤질세라 편승하는 열차 편

거대한 산업

어디로 가나 세상 구석구석

광고의 싸락눈 안 내리는 곳이 없다


천문학적 자본을 쏟아 붓고

인력을 쏟아 붓고

시간을 쏟아 붓고

그것으로 먹고 산다

그것으로 돈 벌어 부자가 된다

그것은 정치 전략의 요체가 되었다


그것으로 먹고사는 함정에서

사람들은 빠져나갈 수가 없다

소비의 왕인 정경 합작의 괴물을

그 누가 퇴치할 것인가

천하무적의 폭군이 지나간 자리엔

영세민의 수만 늘어나고

얽히고 설킨 이른 봄

연못의 맹꽁이 알처럼 파산자가 떠돈다


옛날에 내가 꽃을 심었을 때

옷 나오나 밥 나오나 하면서 어머니는

꽃모종을 뽑아버리고 상추씨를 뿌렸다

그땐 내가 울었지만

옷 나오지도 않고 밥 나오지도 않고

좁쌀 알갱이 한 톨 떨구어 주지 않는 광고는

그러면 꽃인가 종이꽃이다

자본주의의 요염한 종이꽃이다

씨앗도 없는 단절과 절망의 종이꽃



-> 무의미한 메시지가 많다는 문제의식엔 공감하는 바이며, 공허한 메시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직접적이진 않지만 광고와 소문 사이에서 일하는 제 직무에 대해서, 제 직업이 유의미하고 종이꽃으로 남지 않기 위해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고민이 됩니다. 세상 구석구석 내리는 광고의 싸락눈에 일조하는 '인력'중 하나로서 말입니다.



5.

박경리 작가의 유고시집에서는 무엇을 형상화 하는 것보다, 읽히는 글자 그대로 읽어도 부담없이 작가의 삶에 다가갈 수 있어서 한결 읽는데 부담은 없었습니다. 시의 단어 하나하나에 숨겨진 의미가 중요하다며 줄치면서 읽기란 어차피 내공부족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를 꼽아 보자면 바로 작가가 여생을 보냈던 집이라는 '공간'과 삶의 큰 물줄기였던 '가족'에 대한 인식, 고단한 삶에도 부지런한 글쓰기의 원동력이 된 '능동적인 삶의 태도' 정도를 꼽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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